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아편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영국]]이 바란다면, 물론 [[동인도 회사]]의 대반 대신, 국가 관리, 즉 이목을 파견하는 것은 그 쪽의 자유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청국이 공향을 통해서만 이인(夷人)[* 청에서 이(夷)라는 명칭은 중국식, 즉 [[유교]] [[이데올로기]] 식의 통치를 하지 않는 국가나 사람들을 통칭하여 이르는 명칭이었다. 청에서는 현재의 외국인과 같은 의미의 명칭으로 썼으나 서양 측에서는 이 명칭을 혐오하였고 결국 2차 아편전쟁 이후 폐지되었다.]과 접촉하는 옛 제도를 지속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 아닌가." >---- >1834년, 양광총독(兩廣總督) [[https://zh.wikipedia.org/wiki/%E7%9B%A7%E5%9D%A4|노곤]] 일찍이 서양에게 청은 미지의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초기 청을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하며 특히 강건성세의 주인공들인 [[강희제]]와 [[옹정제]]를 고평가하면서 대두되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과 달리 안정적인 하나의 정치체제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진다는 것도 유럽인들에게 낭만의 대상이었다. 당시 청의 [[도자기]]와 가구, 사상이 [[시누아즈리]]라는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대 서구가 이상적으로 바라보았던 [[강희제]](1661~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5~1795)의 태평성세가 전반적인 이완현상을 겪게 된 것은 건륭 중기인 1775년 무렵부터였다. 이러한 현상은 청나라 내부적으로 몇 가지 사항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첫째는 행정체계의 둔화현상이다.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기간동안 황제에게 집중된 권력은 역으로 관료들의 창의성을 억제했으며 누대에 걸치면서 선발되는 관료들 역시 과거시험으로 인해 평균 연령층이 노년화된데다 일단 과거를 거쳐 급제된 이들은 대부분 민생과 대외정책에 있어 현실 미봉책에 급급했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졌으니, 청 말기의 행정체계의 비능률과 침체현상에 더더욱 가속화를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당대 지식인인 [[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C%9E%90%EC%A7%84|공자진]]의 비유처럼 '''"옴에 걸린 사람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 하지는 않고 당장 긁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침상에 묶어놓은 것'''"[* 龔自珍, <明良論>, 1814, 閔斗基 外編 , 1981, p.178]으로 표현한 것은 청조 말엽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은 표현이었다. * 둘째는 사회전반에 걸친 사치풍조와 부패의 만연이었다. 사치를 조장하는 풍조는 [[건륭제]]에 이르러 극에 달했는데, 황제를 포함한 황족, [[고관대작]]과 부농, 부호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일삼았으며, 이와 더불어 관료들에 대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단적인 예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군기대신의 자리에 24년을 재직한 [[니오후루 허션|화신]]의 경우 그의 사후 몰수한 가산의 추정액이 당시 정부의 12년치 세입액에 달하였다고 한다. * 셋째로는 당시의 전국각지에서 청조의 타도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반란풍조와 진압과정을 들 수 있다. 그 중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1796년, 5개성에 걸쳐 약 9년 반 동안 일어났던 [[백련교도의 난]]이었다. 백련교 봉기 세력들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멸청흥한 등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조직화를 시도했지만 극히 일부 지역이다.] 통일된 강령이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런 백련교도의 약점에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10년 가까이 반란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압군인 만주족 청나라의 무능때문이었다. 청의 전통적 중앙 군사조직인 [[녹영(청나라)|녹영]]과 [[팔기군]]이 이 시기에 이미 실질적인 전투력을 상실하였기 때문. 그나마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한 것은 정규군이 아닌 지주나 지방 신사들이 조직한 일종의 [[민병대]]인 향용(鄕勇)과 단련(團練)이었고 이과정에서 지방 한족의 지역 영향력이 상당히 강화된다. 한편, 같은 시기 유럽권에서는 [[강희제|과거와]] [[옹정제|달리]][* 강희제때는 유럽에서 청은 플라톤식 철인정치 국가의 표본으로 극찬을 받았다.] 청의 성장 둔화[* 이러한 성장 둔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이로 인한 토지의 과밀화로 만들어진 고차균형의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이 제기되었으나 이후에도 인구가 완만하게 상승하고 토지의 과밀화가 농업기술의 발전과 토지의 개간으로 감당이 가능하다는 연구가 나온 이후에는 유야무야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로 청은 오히려 구시대적 동양 문명의 표본이 되면서 반(半)문명적 국가로 취급받았으며, 그 대표적인 예시로 영국의 급진주의자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C%9C%8C%ED%81%AC%EC%8A%A4|존 윌크스]]는 "중국이 현재 소유한 모든 고대 제도와 유물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중략) 결국 중국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언제나 패자의 편에 속할 것이다."이라고 평가했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은 이러한 평가의 가장 극단적인 면모를 보였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선입관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하였기에, 중국은) 자신의 역동적인 역사 발전을 위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요소인 세계사 바깥에 존재한다." > >중국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인간은 황제의 수레를 끌기 위해 태어났다. > >앞으로 그들의 역사는 타자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추구되고 그들의 성격이 탐구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더불어 유럽권과의 무역 문제도 한몫 하고 있었다. 명나라 때부터 유럽 상인들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교역을 했는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뇌물 주고 얻은 땅이라 무역항이 아니었다.] 광저우에서의 무역은 1757년 제정된 방범외이장정으로 인해 매우 강한 제한[* 직접 거래를 금지하고 중국인 중개상인인 행상을 통해서만 무역하게 했고 서양인들을 광저우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관료들의 부패, 문화의 차이과 사법권에 대한 인식 문제[*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청에서는 살인자를 무조건 사형했다. 청도 이미지 관리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므로 처벌을 상대방 국가에 위임하거나 혹은 대상자를 줄이는 것으로 대체하였지만 문명국이라고 자칭하던 서양에서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한편 중국인들은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웃긴 건 당시 영국에서는 1실링 이상의 절도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렸다. 문명국 부심은 있는대로 부리면서 자기들도 별로 다를 건 없는 [[내로남불]]이었던 것.]로 인해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1757년 건륭제는 아예 광저우를 제외한 무역항에서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해 버렸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무역항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며 영국 정부는 1792년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B%8C%80_%EB%A7%A4%EC%B9%B4%ED%8A%B8%EB%8B%88_%EB%B0%B1%EC%9E%91_%EC%A1%B0%EC%A7%80_%EB%A7%A4%EC%B9%B4%ED%8A%B8%EB%8B%88|조지 매카트니]]의 사절단을 건륭제에게 파견한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치외법권을 보장받는 차와 생사 생산지역 할양, 안정적인 무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정식 조약 체결, 광저우의 폐단 근절 등을 골자로 한 6대 임무를 받고 공식적으로는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파견된다. 청나라도 이것을 동아시아 스타일 조공사절로 판단하고 최상의 예우를 다했으나 곧바로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청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삼배구고두]]를 해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당시 매카트니는 영국에게 '''영국 왕실의 위엄이 손상 받지 않는 한''' 청 측이 요구하는 궁중 예의를 지키라고 명령받았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삼배구고두는 영국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행위로 판단, 결국 영국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는 수준으로 타협했다. 거기에 청은 이들을 단순한 사절단으로 판단했기에 이들과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봤다. 청은 그들을 곧바로 돌려보냈으며, 결국 매카트니의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건륭제는 별도의 국서를 보내 6개항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모두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은 재차 사절단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사절단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곧바로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서 취소되었다. 어차피 파견되었어도 청도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려고 온 힘을 쏟았을 시기니 무리였을 것이다. 이후 19세기 초기에 여타 유럽 국가들이 청에서 분쟁을 일으켜 [[마카오]]를 점령하거나 상선을 압류하는 등 사고를 치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영국은 다시 사절단을 파견하려 노력했다. 이에 1816년에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Amherst,_1st_Earl_Amherst|윌리엄 피트 애머스트]]의 사절단이 도착했으나 [[가경제]]는 사절을 원하지 않아 '어조가 공손하면 북경으로 입성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천진에서 연회만 해 주고, 그래도 황제가 사냥에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며 되돌려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또 삼배구고두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심지어 사절단 내에서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북경에는 간신히 입성했으나 황제를 알현하는 데는 실패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834년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Napier,_9th_Lord_Napier|윌리엄 존 네이피어]]가 다시 사절단으로 청을 방문했으나 그는 처음부터 영국 상인들을 총괄하는 직책이었을 뿐 별다른 외교적인 권한이 없었다. 심지어 영국은 그에게 가능한 온건하고 우호적인 양해를 유지하며 '''영국 신민이 중화제국의 법률과 습관을 준수할 의무를 명심하게'''[* 유독 이 문장을 강조되는 이유는 하단의 임칙서 파견 부분을 참고.] 하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제멋대로 기존의 관습을 무시해 어그로를 끌었고, 이 때문에 양광총독 노곤과 마찰을 빚자 노곤에게 영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노곤은 오히려 군사를 보내어 상관을 포위해 무역을 강제 중단시키고 네이피어만 떠난다면 무역은 재개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네이피어는 마카오로 돌아간 지 불과 1달 만에 병사했다. 이렇듯 영국의 사절단과 청은 서로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었는데, 결국 영국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외교 활동으로는 청의 문호를 개방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는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시 절정에 다다른 영국의 군대를 이용해 무력시위를 해야 한다는 결정의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